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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의대 “과감한 지원” 약속에도 “졸속 증원 중단” 항의 이어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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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행복한
댓글 0건 조회 4회 작성일 24-04-10 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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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호 교육부총리가 5일 의대 정원 확대에 따른 교육여건을 청취하려 충남대에 방문하자 의대 교수·전공의·학생들이 피켓 시위에 나섰다. 정부는 여전히 정원 2000명 확대안은 유효하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이 부총리는 이날 오후 3시쯤 대전의 충남대 보운캠퍼스를 방문해 김정겸 신임 총장과 병원장, 의대 학장 등을 만났다. 이날은 이 부총리의 7번째 의대 현장 방문이자 마지막 방문이었다.
이 부총리는 이 자리에서 의대 정원 증원에 따른 의대 교육 여건 등을 들었다. 의대 정원이 110명인 충남대는 내년부터 200명으로 늘어난다.
이 부총리는 대학이 수준 높은 의학 교육을 위해 충분히 준비하도록 정부는 강한 의지를 가지고 과감하게 지원하겠다며 교원, 시설, 설비, 기자재 등 교육여건 개선과 교육과정, 임상실습 강화를 포함하는 의대교육 발전 지원을 위한 종합방안을 마련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정부는 지난 4일 의대교육지원 태스크포스(TF) 회의를 열고 국립대 교수 증원, 임상교육훈련센터 확충 등을 논의했다. 정부는 지난 3일에는 의대 전임교수를 1000명까지 증원하면서 내년 1~2월까지 채용할 수 있도록 대학별 교수 정원 증원 규모를 가배정하겠다고도 밝혔다. 정부는 오는 8일까지 의대 증원을 하는 각 대학에게서 시설, 교원 등 수요조사를 받는다.
이 부총리는 또 학생들이 수업에 복귀할 경우, 불이익이 발생하지 않도록 대학과 함께 필요한 지원을 하겠다며 학생들의 학업 복귀를 독려하고 지도하셔야 할 교수님들께서 사직서를 제출하신다면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고 했다.
이날 충남대 보운캠퍼스 의과대학 건물 현관, 복도에선 의대 교수, 전공의, 의대생 등 110여명이 피켓 시위에 나섰다. 이들은 이 부총리가 충남대에 방문하는 시간에 맞춰 졸속 증원 중단하라 원점 재검토 등의 내용을 외쳤다. 준비한 피켓에는 ‘의료계와 협의없는 의대증원 결사반대’, ‘비과학적 수요조사 즉각 폐기하라’ 등이 쓰여 있었다.
정부는 이날까지 기존 의대 정원 증원 규모인 2000명에는 변함이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박민수 의사 집단행동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중대본) 제1총괄조정관(보건복지부 2차관)은 아직 대안이 제시되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에 특별한 변경 사유가 있기 전까지는 기존 방침은 유효하다고 했다.
유통업 경기 기대감이 점차 살아나고 있지만 중국 이커머스 공세에 대한 국내 유통업체들의 불안감도 큰 것으로 나타났다.
대한상공회의소는 500개 소매유통업체를 대상으로 2분기 소매유통업 경기전망지수(RBSI)를 조사한 결과, 전망치가 85로 전 분기(79) 대비 상승했다고 8일 밝혔다.
RBSI는 유통기업의 경기 판단과 전망을 조사해 지수화한 것으로 기업의 체감경기를 나타낸다. 100 이상이면 다음 분기의 소매유통업 경기를 지난 분기보다 긍정적으로 보는 기업이 많다는 의미이고, 100 미만이면 그 반대다.
백화점은 전 분기(97)와 동일하게 가장 높은 기대감을 보였다. 전반적인 소비 심리 위축에도 경기의 영향을 덜 받는 데다 명품과 식품, 여가 등을 강화해 쇼핑과 먹거리, 놀거리를 함께 누릴 수 있는 복합공간으로 자리매김하고 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원화 약세에 따른 외국인 매출 증가도 기대감 상승에 한몫했다.
대형마트(85→96)도 경기 개선에 대한 기대감이 컸다. 신선식품과 체험형 공간 확대에 따른 집객 효과, 의무휴업일 평일 전환과 같은 대형마트 규제 완화 기대감 등이 반영됐다고 대한상의는 설명했다.
온라인(78→84)의 경우 초저가를 무기로 중국 온라인 플랫폼이 국내 시장 진출에 속도를 내는 점 등이 기대감 상승을 일부 제한했다. 업태 중 가장 높은 상승 폭을 보인 것은 편의점(65→79)으로, 온화한 날씨로 유동 인구가 늘어나 식음료와 주류 등의 매출이 증가하는 성수기인 점이 반영됐다.
반면 슈퍼마켓(77→77)은 식품을 강화하는 편의점과의 경쟁이 치열해지는 점 등이 기대감 상승을 제약했다.
중국 온라인 플랫폼의 진출 속도가 빨라지면서 국내 유통기업들의 위기의식도 고조되는 것으로 조사됐다. 응답 업체 10곳 중 7곳(69.4%)은 중국 온라인 플랫폼의 국내 진출 확대가 국내 유통시장이나 유통업체에 위협적이라고 답했다. 또 응답 업체의 74.4%는 이 같은 진출이 국내 유통시장 경쟁을 더욱 심화시킬 것으로 내다봤다.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느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온라인쇼핑의 경우 10개 중 6개 업체(59.1%)가 영향이 있다고 밝혔다. 대형마트(56.7%)와 슈퍼마켓(48.9%)에서도 영향을 받고 있다는 비중이 높게 나타났다.
중국 온라인 플랫폼의 국내 진출 확대와 관련, 대응하고 싶어도 마땅한 방안을 찾을 수 없거나(27.2%), 상황을 주시하면서 향후 대응 여부를 결정할 것(29.2%)이라는 의견이 과반이었다.
김민석 대한상의 유통물류정책팀장은 중국 온라인 플랫폼의 공세에 마땅한 대응 방안을 찾지 못하는 현실을 감안해 정부의 정책적 지원이 시급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피해자 없는 범죄(Victimless crime). 마약이 대표적이다. 신고할 피해자가 없는 범죄 마약은 조용히 사회 곳곳에 퍼져갔다. 남녀노소·사농공상 가리지 않고 마약 투약자는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특히 ‘저연령화’가 두드러진다. 가장 보편적인 마약류가 메스암페타민, 즉 히로뽕이다. 온갖 종류의 마약이 우후죽순 퍼져나간 데는 히로뽕이 60여 년 전부터 한국 땅에 중독의 토양을 만들어 놓은 영향이 컸다. 히로뽕 유통의 역사를 이해하는 것이 만연한 마약 유통의 문제를 이해하는 출발점이 되는 이유다. 주간경향에서 히로뽕의 역사와 현재 즉 대한민국 ‘뽕의 계보’를 5회에 걸쳐 되짚는다. 직업물 웹소설 및 실화 기획사 팩트스토리와 공동기획했다. <편집자 주>
[주간경향] 마약왕이라 할 만한 사람이 누가 있을까요?
히로뽕 유통업계의 ‘상선’(총책을 가리키는 은어)으로 꼽히는 이들을 만날 때마다 물었다. ‘마약왕’이란 용어가 조금 유치하다 생각했지만, 누가 히로뽕 계의 가장 큰 거물이고 영향력이 있는지 단번에 파악할 수 있는 질문이었다. 답변 중에는 ‘그때그때 다르다’라는 말이 가장 많았다. 한때 대량의 히로뽕을 유통했다 사라진 이들도 있고, 오랜 시간 활동해왔지만 다루는 물량의 변동 폭이 심한 이들도 있었다. ‘마약왕이 검거됐다’라는 언론보도도 대체로 부풀려진 사례가 많았다.
이 세계에서 마약왕이라고 부를 만한 이들은 오랜 세월 교도소와 사회를 오가면서도 명성을 잃지 않는 소수에 불과하다. ‘영원한 마약왕은 없다’라는 게 정답에 가깝다. 한때의 마약왕이 평범한 장사꾼이 되기도 하는 게 이 바닥의 생리였다. 하지만 이런 세계에서도 항상 ‘거물 중의 거물’로 거론되는 이가 있었다. 2000년대부터 알려진 Y였다.
Y는 히로뽕의 세계에 몸담은 이들이라면 한 번쯤 들어봤을 법한 이름이라고 한다. 그의 이름을 모른다면 오히려 이 세계에 연륜이 덜 쌓였다고도 할 수 있다. 그는 본명보다 ‘성일’이란 가명으로 유명했다. 그의 가명을 딴 조직 ‘성일파’는 언론에도 여러 번 오르내렸다.
Y는 2000년대 초 전국 히로뽕 유통량의 60~70%를 차지했던 인물이다. 한국이 주요 히로뽕 생산국에서 주요 소비국으로 자리를 바꾸면서 국내 히로뽕 유통업자들은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세계의 공장’으로 불리던 중국이 히로뽕 업계에서도 새로운 공급처가 됐고, 중국에서 대량의 히로뽕을 들여오는 거물급 업자들이 등장했다. Y는 2000년대 초 시장을 장악한 뒤 이후에도 지속해서 명성을 유지한 인물로 꼽힌다.
징역 9년을 선고받아 교도소에 수감 중인 Y와 주로 편지로 대화했고, 한 차례 접견했다. 자타공인 마약왕 중 한 사람이었지만 직접 만난 Y는 동네 사우나에서 만날 법한 평범한 중년 남성이었다.
대구가 고향인 Y는 1974년부터 경주에 살았다. 타지에 살게 되면서 친구를 따라 가명을 썼다고 했다. Y는 1984년 결혼하는 등 평범한 삶을 살았다. 경주 불국사 인근에서 여관과 기념품 가게를 하면서 도박판도 운영했다. 그러다 예기치 않게 1987년 인생의 전환점을 맞았다.
Y는 히로뽕 투약으로 붙잡혔다 풀려난 후배에게 ‘대체 그게 무엇이냐’고 물었고 후배가 히로뽕을 건넸다. 호기심이 경계심을 허물었다. 그때는 이 히로뽕이 그의 인생을 이전과 전혀 다른 궤도 위에 올려놓을 줄 몰랐다. Y는 그때 이후 투약을 계속했고, 1989년 구속돼 첫 징역을 살았다.
교도소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Y도 수많은 히로뽕 투약자 중 한 사람일 뿐이었다. Y를 마약왕으로 성장시킨 곳은 역설적으로 교도소였다. 감옥은 죄를 처벌하고 잘못을 뉘우치며 사회로부터 범죄자를 격리하기 위한 곳이지만, 히로뽕의 세계에선 인맥을 넓히기 위한 ‘사교의 장’이었다. 전국의 ‘뽕쟁이’들이 교도소에서 안면을 트고, 인사를 하고 안부를 주고받는다. 교도소를 괜히 ‘학교’라고 부르는 게 아니다. 이때의 인연이 히로뽕의 세계에서 높은 곳으로 오르는 데 필수적이다.
Y는 1980년대 활동한 히로뽕 유통의 거물들처럼 일본에서 온 히로뽕 제조 기술자에게 배우거나, 바다를 누비는 밀수선을 타지도 인스타 팔로워 늘리기 않았다. 대일본 밀수에 종사한 이들을 국내 히로뽕 1세대라고 한다면, Y는 순수 국내파로 성장한 2세대라고 할 수 있다.
히로뽕 사업은 ‘믿을 수 있다고 판단하는 사람과 불법적인 물건을 사고파는 일’이다. 얼굴을 맞대고 서로에 관해 알아가는 것이 그 출발이다. 이때나 지금이나 히로뽕을 사고파는 데 특별한 기술이나 자격이 필요한 게 아니다. 히로뽕 장사에 필요한 단 하나의 요소만 꼽자면 ‘인맥’이다.
Y도 교도소에 들어가서 인맥을 만들었고 출소한 뒤 히로뽕 매매에 뛰어들었다. 교도소에서 만난 이들과 힘을 합쳐 거래를 트고, 지인의 지인을 소개받는 방식으로 발을 넓혔다. 돈만 주고 물건을 못 받는 사기도 당하고, 믿었던 지인에게 배신도 당하면서 Y는 히로뽕 사업의 규칙을 익혀갔다.
1990년대 중·후반 국내 히로뽕 업계는 이전과 본질에서 달라졌다. 우선 히로뽕이 한국의 주류 마약이 됐다. 마약류 사범 중 주로 히로뽕과 관련된 향정(향정신성의약품)사범이 차지하는 비율은 1995년 이후 급속히 증가해 이내 전체 마약류 사범(마약·향정·대마)의 50%를 웃돌기 시작했다. 2001년에는 78.8%를 차지했다.
공급처도 눈에 띄게 달라졌다. 이전까지 국내 유통 히로뽕의 대부분은 국내에서 만들어졌다. 그런데 국내의 히로뽕 제조 공장들이 강력한 단속에 하나둘 문을 닫고 여기에 1992년 한국과 중국이 수교하면서 완전히 다른 길이 열렸다. 중국과 왕래가 자유로워지자 히로뽕 업계에 몸담은 이들은 새로운 기회가 왔음을 바로 알아차렸다. 중국은 히로뽕 제조 원료인 염산에페드린을 만드는 마황을 쉽게 구할 수 있었고, 히로뽕이 아직 널리 알려지지 않아 처벌도, 단속도 거의 없었다.
부활을 꿈꾸던 한국의 히로뽕 기술자들이 중국 동북부로 향했다. 동북부에는 말이 통하는 중국 동포가 많았고, 원재료도 구하기 쉬웠다. 중국에 자리를 잡은 기술자들은 히로뽕을 만들어 한국으로 보내기 시작했다. 히로뽕 생산지이자 수출국이던 한국은 이 무렵부터 히로뽕 수입국이 됐다. 훗날 중국도 그렇지만, 히로뽕 생산국은 결국 소비국이 된다.
2000년대 초가 되자 중국에서도 히로뽕 제조 시설에 대한 단속이 강화됐다. 2001년 9월 한국인 히로뽕 제조업자가 적발돼 사형을 당하기도 했다. 이 일은 외교 문제로 불거졌다. 한국 정부는 중국에 사전 통보 없이 사형을 집행했다며 항의했고, 중국 측은 미리 전달했다고 반박했다. 사형된 신모씨는 1990년대 후반 중국으로 가 히로뽕을 만들어 국내로 밀반입하던 인물이었다. 신씨 외에도 제조 공장을 차려놓고 히로뽕을 만들던 한국인들이 연거푸 중국 공안 당국에 붙잡혔다.
중국에서 직접 히로뽕을 만드는 일의 위험성이 커지던 무렵 ‘북한산 히로뽕’이 시장에 등장했다. 북한산 히로뽕은 북·중 국경을 타고 넘어와 한국인 밀수업자 손을 거친 뒤 한국으로 들어왔다. 중국 남부에서 대만계 폭력조직이 주도해 만든 히로뽕은 가격이 쌌지만 순도가 떨어졌다. 북한산 히로뽕은 조금 비싸도 품질이 우수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중국에 자리 잡은 한국인들은 제조 대신 밀수를 전문적으로 하기 시작했다. Y도 바로 이때 교도소에서 쌓은 인맥을 통해 중국에서 히로뽕을 건네받는 일에 뛰어들었다. 그는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거래방식도 과감하게 도입했다. 기존 히로뽕 거래에서는 ‘한 손으로 히로뽕을 건네면 다른 손으로 현금을 건넨다’라는 ‘오른손 왼손 거래’가 주였다. 추적을 피하고자 자동차에서 돈을 확인하고 다른 곳으로 이동해 히로뽕을 건네는 ‘차치기’ 도 있었다.
2000년대 들어 새롭게 등장한 것이 차명계좌를 이용한 거래였다. 지금은 불법 거래를 할 때 차명계좌를 이용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당시에는 신종 수법이었다. 중국에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한국으로 숨겨 들어온 히로뽕은 운반책인 ‘지게꾼’이나 고속버스 화물 탁송 등을 이용해 한국의 유통업자 손으로 들어갔다. 직접 만나 현금과 히로뽕을 주고받기 어려운 한·중 간 히로뽕 밀수는 차명계좌 수법의 등장으로 보편화했다.
중국을 통한 북한산 히로뽕 밀수와 차명계좌를 사용하는 거래 방식의 변화를 Y는 제대로 포착했다. Y는 대량의 히로뽕을 전국에 빠르게 유통했고 단숨에 전국적인 히로뽕 유통업자가 됐다.
Y가 히로뽕 업계에 발을 들였을 때부터 주도면밀하게 계획해 마약왕의 자리에 오른 것은 아니다. 선배의 배신으로 Y를 따르던 동생과 친구들이 모두 구속되는 일도 겪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이때쯤 조용히 숨어 지내려고 했을 터지만 Y는 ‘이판사판’으로 사업을 더 확장하기로 했다.
Y는 중국에서 밀수업자로 활동하는 친구를 통해 히로뽕 수십㎏을 받아 전국에 유통하기 시작했다. 궁지에 몰리자 평소라면 감당하지 못했을 만한 양을 과감하게 받아 국내에 뿌렸다.
2002년 Y가 검거됐을 때 관련 기사를 보면, Y는 북한산 히로뽕을 약 7개월간 매달 3㎏씩 모두 20여㎏을 들여와 국내에 유통했다. 당시 가격으로 약 700억원 규모였다. 기사에는 ‘정제가 뛰어나고 순도가 매우 높아 중국산이라기보다는 북한산으로 추정된다’라는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분석 결과가 소개됐다. 수십 개의 차명계좌도 발견됐다.
당시 서울중앙지검은 집중적인 히로뽕 유통 단속을 해 10개 밀매팀을 적발했다고 발표했다. 이른바 ‘10개 파 사건’이다. 이중에 Y도 포함됐다. 대구 경찰에 붙잡힌 Y는 서울중앙지검으로 이송됐다. 이때를 기점으로 국내 히로뽕 유통량은 크게 줄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증가한다.
대검찰청이 낸 2005년도 마약류 범죄백서를 보면, 향정사범의 수는 2001년 7959명, 2002년 7918명이었다. 10개 파 사건 이후인 2003년 향정사범은 4727명으로 40.3%나 줄었지만, 2004년 5313명으로 바로 반등했고 이후 꾸준히 증가했다.
백서는 2002년도에 강력한 단속 효과에 힘입어 밀수 등 공급조직 10개 파 224명이 단속됨에 따라 마약류 공급선 차단 등으로 2003년도에 마약류 사범이 급감한 이후 그 여파가 2005년도에도 지속하는 상황이라면서도 주종 마약류인 향정사범은 2003년도에 대폭 감소하였으나 2004년도부터 지속해서 증가하고 있는 실정이라고 적었다.
Y는 이 사건으로 징역 5년 6개월의 실형을 살았다. 현재 기준으로 보면 대량의 히로뽕을 밀매하고도 형량이 크지 않았다.
Y는 2007년 7월 출소한 뒤에도 히로뽕 판매를 계속한다. 이전과 달리 그의 이름값은 한참 높아져 히로뽕 업계에서 거물급 유통업자로 여겨졌다.
Y는 부산과 울산 등 경남지역 수사기관의 정보원으로도 활동하기도 했다고 직접 밝혔다. 히로뽕 세계의 사건 브로커를 가리키는 이른바 ‘야당’이었다. Y는 야당으로 활동하며 히로뽕 유통을 병행했다. 히로뽕의 세계에서 야당을 겸한 히로뽕 유통업자는 매우 위험한 존재로 인식된다. 야당 중에는 자신도 히로뽕을 팔면서 경쟁자를 수사기관에 제보해 밀어내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야당 활동을 한 경력은 히로뽕 유통업계에서 누군가를 배반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당연히 이를 대놓고 드러내지 않는 이가 많다. 하지만 Y는 자신이 히로뽕 사건 수사에 도움을 많이 줬다는 걸 숨기지 않았다. 밀반입 판매자들을 작업해 약 8~10㎏을 압수하도록 작업한 적도 있습니다.
Y는 2013년부터 한동안 카드 도박판을 운영하기도 했다. 2000년대 초반, 마약왕으로 불렀던 그의 경력과는 조금 맞지 않아 보이지만, 히로뽕 유통을 하는 이들이 다른 사업을 병행하는 일은 흔하다.
Y는 시대의 변화를 제대로 포착해 과감하게 나선 마약왕으로 꼽힌다. 그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세우는 히로뽕 업계 후배도 많다. 하지만 그 역시 사회와 교도소를 오가는 히로뽕 세계의 인과율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Y에 따르면, 그는 2018년 우연찮은 기회로 일본 야쿠자 쪽과 연결됐다. 2018년 7월 대만의 조직에서 일본의 조직으로 넘기기 위해 한국으로 밀반입된 히로뽕 112㎏ 중 22㎏이 Y의 손에 들어왔다.
남은 히로뽕을 판매하려던 대만 조직이 구매처를 수소문하는 과정에서 이들의 계획이 국정원과 서울경찰청 마약범죄수사대에 포착된다. 경찰은 히로뽕을 압수하고 같은 해 11월 20일 부산의 한 호텔에서 Y를 체포했다. 그는 이 일로 징역 9년을 선고받았다.
Y는 기자에게 자신의 글솜씨가 부족하고 접견 시간은 짧으니, 출소 후 만나 경험담을 자세히 들려주겠다고 했다. 그에겐 영화처럼 흥미로운 경험담이 많을 테다. 영화 <범죄도시 3>에는 중국과 일본을 오가는 마약거래상의 이야기가 담겼는데, Y의 사건도 모티브 중 하나로 쓰였다고 한다. 하지만 수감생활은 영화가 아닌 현실이었다. Y는 고희(古稀)를 맞는 2026년이 돼야 만기 출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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